푸른 정적의 도시, 대전에서 띄우는 편지

 

푸른 정적의 도시, 대전에서 띄우는 편지

누군가는 대전을 가리켜 ‘노잼(No-jam)의 도시’라 부르며 농담을 던지곤 합니다. 자극적인 즐길 거리나 눈을 어지럽히는 화려한 네온사인이 드문 이곳의 풍경이, 속도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에게는 다소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대전이라는 도시를 조금 더 깊이, 그리고 오래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압니다. 이 도시가 가진 진짜 매력은 ‘자극’이 아니라 **‘안온함’**이며, ‘소음’이 아니라 **‘여백’**에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늘 나는 이 도시의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는 푸른 정적과, 그 속에 숨겨진 보석 같은 풍경들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갑천, 흐르는 시간의 부드러운 살결

대전의 풍경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단연 갑천입니다. 도시의 허리를 가로지르는 이 강물은 대전의 호흡과도 같습니다. 해 질 녘 엑스포 다리 위에 서서 강물을 내려다보면, 강물은 서두르는 법 없이 유유히 흐르며 하늘의 빛깔을 그대로 담아냅니다.

노을이 지기 시작하면 강물 위에는 금빛 가루를 뿌려놓은 듯한 윤슬이 반짝입니다. 그 위로 1993년의 기억을 간직한 엑스포 다리의 아치가 붉게 물들고, 건너편 스마트시티의 현대적인 실루엣이 교차하는 모습은 대전만이 보여줄 수 있는 ‘과거와 미래의 공존’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속도로 강변을 걷습니다. 누군가는 자전거를 타고 바람을 가르고, 누군가는 반려견과 함께 느릿한 산책을 즐깁니다. 그들의 표정에는 조급함이 없습니다. 갑천의 물결이 도시 전체의 맥박을 천천히 늦춰주는 것만 같습니다. 강변에 가만히 앉아 물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음속에 엉켜 있던 번뇌들도 강물을 따라 하류로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듭니다.


한밭수목원, 도심 한복판에 핀 녹색의 위로

콘크리트 숲 사이에서 숨이 막힐 때쯤, 우리는 한밭수목원으로 숨어듭니다. 이곳은 대전이 시민들에게 선물한 거대한 ‘숨구멍’입니다. 수목원의 오솔길을 걷다 보면 이곳이 광역시의 중심부라는 사실을 잠시 잊게 됩니다.

계절마다 수목원은 옷을 갈아입으며 우리에게 말을 건넵니다. 봄이면 연분홍 벚꽃과 철쭉이 피어나 생명의 시작을 알리고, 여름이면 짙은 녹음이 뿜어내는 싱그러운 풀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힙니다. 가을이면 타오르는 단풍이 생의 절정을 노래하고, 겨울이면 앙상한 나뭇가지 위로 내려앉은 정적 속에 내면을 응시하게 합니다.

특히 내가 사랑하는 곳은 수목원의 연못가입니다. 연잎 위로 굴러가는 빗방울이나,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숲을 보고 있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위로를 받는 듯합니다. 효율과 생산성을 강요받는 세상에서,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는 진리를 수목원의 나무들은 묵묵히 몸소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청호, 안개가 빚어낸 몽환의 수묵화

대전의 외곽으로 시선을 돌리면, 그곳에는 어머니의 품처럼 넓고 깊은 대청호가 있습니다. 대청호를 감싸 안은 ‘대청호 오백리길’은 걷는 이들에게 사색의 시간을 선사합니다.

이른 아침, 대청호에 물안개가 피어오를 때의 풍경은 마치 한 폭의 수묵화와 같습니다. 호수 너머의 산등성이들이 겹겹이 중첩되어 보이고, 안개 사이로 비치는 햇살은 비현실적인 신비로움을 자아냅니다. 호숫가에 서 있는 외로운 미인박명(美人薄命) 같은 고사목들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서 있습니다.

대청호의 풍경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대신 **‘깊이’**가 있습니다. 수심을 알 수 없는 호수의 푸른 빛깔은 보는 이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수면 위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은 세상의 소음을 잠재웁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비로소 나 자신과 마주할 용기를 얻습니다. 거울처럼 맑은 호수 위에 비친 나의 모습은, 도시의 거울 속에서 보았던 지친 모습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집니다.


식장산에서 내려다본 밤, 삶이라는 이름의 별빛

대전의 하루가 저물어갈 때, 마지막으로 향해야 할 곳은 식장산 전망대입니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라 정상에 다다르면, 발아래로 대전 시내가 한눈에 펼쳐집니다.

낮 동안 분주했던 도시는 밤이 되면 수만 개의 조명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격자무늬로 정렬된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의 전조등은 혈관을 흐르는 피처럼 살아 움직이고, 아파트 단지의 불빛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담은 작은 별이 되어 지상에 내려앉습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대전의 야경은 경이롭습니다. 저 불빛 하나하나 아래에는 누군가의 저녁 식사가 있고, 아이의 웃음소리가 있으며, 내일을 준비하는 고단한 꿈이 숨 쉬고 있을 것입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도시는 이토록 평온하고 아름다운데, 우리는 왜 그 안에서 그토록 치열하게 아파했을까요. 식장산의 차가운 밤공기를 마시며 내려다보는 도시의 불빛은, 우리네 삶이 멀리서 보면 얼마나 반짝이는 존재인지를 일깨워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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